일요일, 9월 11, 2011

[독서광] 건축가처럼 생각하기

몇 차례에 걸쳐 블로그에서 페트로스키 큰 형님께서 지은 책과 사상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종이 한 장의 차이를 보면 디자인에 대해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오므로 디자인에 관심이 많은 애독자들분께서 좋아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기계 공학이 아니라 건축으로 넘어가 디자인을 한번 생각해보는 기회를 마련하려고 한다. 오늘 소개할 책은 아쉽게도 지난 5월에 돌아가신(고인의 명복을 빈다) 할 박스 교수가 '지은 건축가처럼 생각하기'다.

다들 충분히 알고 계시다시피, 전산쪽에서는 본질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풀어내는 과정으로서 디자인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구조화 설계, 객체 지향 설계, 패턴, 안티 패턴, CBD(Component Based Design)과 같은 여러 가지 설계 프레임워크나 기법이 등장했고, 다양한 분야에서 디자인 기법을 차용하려 많은 공을 들여왔다. 예를 들어, 크리스토퍼 알렉산더가 집필한 'A Pattern Language'는 어찌된 판인지 한국에서는 건축 분야보다 전산 분야에서 더 널리 알려지는 흥미로운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전산 쪽 사람들이 건축 쪽 설계에 대해 잘 아느냐? 본인부터 거울에 비춰보면 막상 그렇지도 않은 듯이 보인다(물론 일반화의 오류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A Pattern Language'를 _제대로_ 읽어보신 분 있으면 댓글을 달아보시라. 커피 한 잔 사드린다.) 어찌되었거나... 건축 대가들이 설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어떤지 무척 궁금하던 차에 서점 가판을 뒤지다 이 책을 발견했는데, 초대박이다.

이 책은 건축을 둘러싼 다양한 담론을 편지 형태로 다루기 때문에 복잡한 건축 이론이나 수식이 최소로 나온다. 이렇듯 책 내용이 쉬우면 부실하다는 인상을 주기 쉽지만 이 책은 자신이 직접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을 설계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자기가 살 집을 지은 경험을 토대로 주제를 뽑고 있으므로 그냥 책상에 앉아 대충 끄적인 책과는 수준부터 다르다. 전반적으로 다루는 주제나 전개 방식이 아주 훌륭하다고 느껴지지만, 특히 책 제목과도 똑같은 8장 '건축가처럼 생각하기: 디자인 전개 과정', 9장 '그림과 모형, 연픽과 컴퓨터로 표현해보기: 시각화 과정', 13장 '디자인 의사 결정', 14장 '스타일, 취향, 디자인 이론' 이 4장은 한 페이지도 놓치기 싫을만큼 좋은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중간 중간에 크리스토퍼 알렉산더에 대한 일화도 나오고('A Pattern Language'가 나왔을 때, 학생들이 읽으면 안 될 금서로 지정하자는 교수도 있었다고 한다. ㅋㅋ), 모더니즘이 오히려 편안하고 친숙한 공간을 만드는 과정에 방해가 되는 설명도 나오고, 미국의 주간 고속도로가 설립되면서 도시 구조가 지극히 돈만 밝히는 형태로 짜여진 이유도 나오고(미국에서 렌트해 실컷 운전하면서 도심, 주거지, 상업지구가 확실하게 구분되는 이유를 몰랐는데, 이제야 감을 잡았다. T_T), (무엇보다) 소프트웨어 뿐만 아니라 건축 과정에서도 계속 설계가 바뀐다는(이 때문에 여분의 자금을 모아놓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상당히 충격적인 이야기도 나오므로 건축에 대한 오해가 아아주 조금이라도 풀린 느낌이다.

본문에 좋은 이야기가 많이 나오므로 오늘은 8장에서 선별한 내용 중에 다시 선별해 정리해보았다. 책을 그대로 다 옮기고 싶지만 꾹 참아본다.

디자인은 정보와 영감과 솜씨 있는 해결 방안과 표현의 수단을 찾기 위한 직접적이고 논리적인 탐구 과정입니다. 창조적인 문제 해결 방안이 예술이 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기능을 담고, 기능을 특징으로 하는 예술 말이입니다.
예산은 프로젝트의 가장 중요한 현실입니다. 예산이 상황을 좌우합니다. 모든 것이 기준이 됩니다.
목표나 재료에 변동이 생기면 예산도 바뀌어야 합니다.
디자인 전개 과정 중에, 새로운 요인들이 발견되고, 우선 순위가 바뀌면서 계획이 재조정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건축 디자인이 복잡한 이유는 언제나 너무도 많은 변수들이 경합을 벌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해결 방안은 문제 해결 과정을 시각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하나로 종합했다면, 머리 속에 커다란 솥을 걸고 찌개를 끓이는 일을 생각하세요. 잘 저어 가며 끓이다가 때때로 조금씩 떠서 맛을 봐야 하지요.
제가 그리는 양과 지우는 양은 거의 맞먹을 정도입니다.
철저한 조사로 준비하라. 별난 천재처럼 흩어짐 없이, 사로잡힌 듯, 열정적으로 집중하라. 꿈을 꾸고 행동하라. 소중하게 품어 왔던 생각을 내려놓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하라. 대지를 찾아가 보고 아이디어를 논하고 이전에 지어진 건축물을 평가하며 '번뜩이는 통찰력'을 찾아라. 효과적으로 일하라. 발전시킨 아이디어를 디자인에 적용해 문제를 해결하라. 스스로의 작업을 평가하라. 만일 만족스런 작품을 얻지 못했다면 다른 시각으로 네가 원하는 결과에 도달할 때까지 이 과정을 되풀이하라.
우리가 창조하려는 건축은 머릿속의 막연한 환상이 아닌 도면과 모델과 이미지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복합적인 것을 복잡한 것과 헷갈려서는 안 됩니다.
도면 작업이 끝났다고 해서 디자인까지 멈추는 것은 아닙니다.
설계를 하는 데는 개념을 파악하는 능력과 기본적인 지식,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합니다.
디자인 전개 과정은 기능적인 문제와 건물 시스템, 미적인 문제 사이에서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기 마련입니다. 이 때 일정하게 정해진 디자인 이론을 지침으로 삼으면 효과적으로 작업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가장 훌륭한 디자인 원리는 뭔가를 '아주 적절하게' 만드는 일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뽐뿌질은 충분했으리라 보고 나머지 좋은 이야기는 직접 본문을 확인하시길... 그러면, 애독자 여러분들께서 추석 연휴 모두 즐겁게 보내기를 기원한다.

EOB

댓글 1개:

  1. 맨끝에 '아주 적절하게'라는 말이 강하게 와닿는군요. 제일 어려운 일일거에요. 하지만 이래야 제일 멋진 디자인이 나오겠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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