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6월 01, 2013

[독서광] 보이지 않는 고릴라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15년도 훨씬 지난 이야기를 하나 꺼내봐야겠다. 택시를 타고 가다 우연히 다른 택시와 충돌하는 바람에 경찰서에 증인으로 조서를 작성할 기회가 있었는데, 사람의 기억력에 대해 놀랄만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조서를 꾸며보신 분이라면 다들 아실텐데, 사고 순간에 대한 진술만 받지 않는다. 사고 전후 1시간 동안 어디서 뭘 했는지에 대해 최대한 자세히 진술해야 한다. 그 날 나를 맡은 담당자가 마음이 좋았는지, 증인 조서를 다 작성한 다음에 자기가 직접 차를 몰고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내가 진술한 내용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하나둘씩 짚어주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나는 부분이 강북에 사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종로구 소재 사직 터널이다. "사직 터널의 상행선과 하행선 차선이 각각 몇 개일까요?" 이게 바로 담당자의 질문이었고, 나는 완전 엉터리로 대답하고 만 것이다(차선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터널 개수부터 틀렸다). 그 날 이후부터 의식적으로 (나를 포함한) 사람의 기억력에 대해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블로그 주인장의 망가진 기억력에 대해 다들 즐거워하고 있을텐데, 오늘 소개하는 책은 바로 우리 모두의 인지능력에 심각한 문제(아니 제약)가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밝히는 '보이지 않는 고릴라'다. 동명의 심리학 실험으로 더욱 유명해진 이 책은 우리의 기억력은 물론이고 신념과 직관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아니 못하는) 분위기에 찬물을 확 끼얹어 정신이 번쩍 들게 해준다. 우선 고릴라 실험부터 한번 보자. 주의 깊게 흰팀이 패스하는 숫자를 세보기 바란다.

자, 실험 과정에서 뭔가 특이한 사항을 눈치채었는가? 눈치 채지 못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자. 사람들은 원래 두 가지 이상 작업을 할 경우 주의력이 분산되니까 말이다. 이 책은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을 필두로 주의력 착각, 기억력 착각, 자신감 착각, 지식 착각, 원인 착각, 잠재력 착각이라는 여섯 가지 착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직전에 소개한 [독서광] 우리는 왜 실수를 하는가가 사람의 한계로 인해 벌어지는 다양한 실수를 소개한다면, 이 책은 이런 실수와 행동 이면에 숨겨진 '착각'에 대해 소개하므로 같이 읽어보면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더 넓어지리라 생각한다.

일상에서 착각이 위험한 이유는 매일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만 사실상 본인이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착각을 막거나 줄이기 위해 고안한 여러 가지 도구와 기술이 주의를 분산시켜 오히려 더 큰 위험을 초래할지도 모르며, 착각을 막기 위한 인간 능력 계발은 특정 분야를 벗어나 일반적인 분야까지 효과를 보이기는 지극히 힘들기에 늘 열린 마음으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착각을 줄이기 위해 심사숙고하는 방법 밖에 없는 듯이 보인다. 이 책은 여러 사례와 실험 결과를 토대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정신이 동작하는 원리를 설명하므로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이 겸손해지도록 유도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제공한다.

이 책은 일상뿐만 아니라 전문 지식이 필요한 분야에서도 좋은 힌트를 제공한다. 도움이 될만한 부분을 정리해보겠다.

우리 대부분은 지식의 깊이가 얕기 때문에 첫 번째 질문에 대답하면서 알고 있던 내용을 전부 소진한다. 우리는 질문마다 답이 있으며 그 답도 잘 알거라 생각하지만, 이를 설명해보라는 질문을 받기 전까지는 자신의 지식에 결함이 있었다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한다.
2008년 '탑코드 오픈(TopCoder Open)'이라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토너먼트 대회에서 우승해 25,000달러의 상금을 탄 팀 로버츠는 지식 착각에서 벗어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았다. 요구조건을 충족하는 프로그램 개발에 주어진 시간은 단 6시간이었다. 그는 다른 경쟁자들과 달리 처음 한 시간은 요구되는 사양을 연구하고 담당자에게 질문(적어도 30개)하느라 소모했다. 도전 과제를 완전히 이해한 후에 코딩을 시작한 로버츠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요구된 사항만 정확하게 구현된 프로그램을 완성했다. 프로그램은 제대로 작동했고 작업도 제 시간에 끝났다.
"나는 부주의하고, 기억력이 나쁘고, 지능이 낮고, 멍청하다'와 같은 착각은 일어나지 않는다. 반대로 일상의 착각은 우리가 실제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기억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며, 자신이 평균보다 우위에 있고, 세상과 미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게끔 속인다.
지식 착각에서 벗어나려면, 낯선 프로젝트에 대해 당신이 추정한 소요 기간과 비용 예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지식의 한계를 무시한 채 주장을 펼치는 사람을 선호한다. 자기계발서 저자들 중에서도 무엇을 해야할지 정확하게 말해주는("저거 말고 이거 먹어")식의 작가들이, 합리적인 메뉴 선택권을 주면서 독자 스스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게 하는 작가들보다 인기가 많다.

결론: 이 책을 읽고 나면 최소한 SATA 케이블 음질 테스트 결과, "헉! 말도 안 돼"에 나오는 소위 전문가들의 자신감에 넘치는 설명(“SATA 케이블을 통해 전송·저장한 음원 데이터라면 차이를 못 느낄 수 있지만 SATA 케이블을 통해 실시간 재생을 할 경우엔 데이터 보정이 안 되어 노이즈에 따른 음질 차이가 보다 크게 느껴질 수 있다” 으으으으으으으응?) 정도는 가볍게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뱀다리: 이 책 중간 중간에 은근슬쩍 말콤 그래드웰을 디스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의외로 꼼꼼하다. 그리고 구글 안경 쓰면 거리에 고릴라 지나가도 못 봐?라는 관련 기사도 떴네?

댓글 3개:

  1. 헉! 패스하는 숫자는 맞혔는데, 고릴라는 못 보았네요!
    동영상을 다시 보니 정말! 고릴라가 지나가네요. ㅠ.ㅠ

    답글삭제
  2. // Kabi님

    저는 책을 읽고나서 비디오를 봤는데도... 패스에 정신이 팔려 못봤습니다! T_T

    다들 많이 못 보실 듯. ㅋㅋ

    답글삭제
  3. 이건 정말 내가 공유를위한 감사합니다 도움..!!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