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지하철을 타고 가다 급한 프로그램 수정 요청을 받아 자리에서 노트북을 꺼내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프로그램에 몰입한 상태라 몰랐는데, 10분 정도 지난 다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옆에 중년 신사 한 분이 뚫어지게 내가 하는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색하게 말을 거셨다.
실례지만 혹시 무슨 일을 하십니까? 지금까지 제가 본 누구보다 _타이핑_을 빨리합니다.
프로그램을 작성하다보면 정해진 키워드, 변수, 함수, 라이브러리는 거의 한 단위로 입력 가능하므로 옆에서 보기에 엄청난(음... 열악한 노트북 키보드로 500타 이상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타이핑 장관이 펼쳐지는 것도 당연하지만... 프로그램 작성 = 타이핑이라는 참신한 시각에 무척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하긴 어르신들 세대에 프로그래밍은 지극히 이국적인 행위였을테니 둘 사이 구분을 하지 못하는 현상을 충분히 이해한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게 된 이유는 요즘 한창 마무리 작업 중인 '피플웨어'에 기술과 환경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다음 문구를 읽고나서 거의 기절초풍했다.
디즈니 특별 연구원 앨런 케이는 기술을 '지금 있는데 옛날에 없던 것'으로 정의합니다. 케이는 한 걸음 더 나가 옛날에 있던 것은 이름이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환경입니다. 우리 세대의 기술은 다음 세대의 환경입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고백을 하나 해야겠다. 컴퓨터를 처음 접한지 수십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스마트폰과 태블릿을 사용하면서 뭔가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어렴풋이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피플웨어에 나온 문구를 읽어보는 순간 깨달음이 오고 말았다. 바로 스마트폰과 태블릿을 자연스런 환경이 아니라 인위적인 기술로 보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스마트폰을 마치 몸의 일부처럼 활용한다는 부러움이 들었는데, 중년 신사분이 내게 느낀 감정 그대로다. 나와 달리 젊은 친구들은 환경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있음이 틀림없다.
최근 초등학교부터 프로그램을 가르치자, 10만 프로그래머를 양성하자, 빅 데이터 전문가 수 천명을 배출하자는 둥 IT 업계와 관련된 여러 담론이 사방에서 나오고 있는데, IT 기술이 더 이상 첨단 기술이 아니라 자연스런 환경이 되버린 상황에서 예전 기술 우위에 입각한 사고 방식으로 얼마나 신새대를 설득할 수 있을지 참으로 궁금하다. 피플웨어에서 뒤에 이어지는 글을 계속 살펴볼까?
20세기 말에는 가정과 학교서는 찾아보기 어려우나 회사에는 존재하는 중요한 기술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젊은 프로그래머들에게 컴퓨터, 스마트폰, 웹, 프로그래밍, 해킹, 소셜 네트워킹, 블로깅은 이제 기술이 아니라 환경입니다. 젊은 친구들에게 이런 주제를 놓고 제작 기술에 대해 가르치기가 어려울뿐더러 기술 사용에 따르는 윤리에 관해 떠들어 봤자 소 귀에 경 읽기입니다.
그렇다. 이 기술이 중요하다는 둥 저 기술이 중요하다는 둥 사과 심어라 배 심어라 할 시기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난 듯이 보인다. 따라서 설레발치며 다 된 밥에 재뿌리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기를 간곡하게 희망한다. 다 큰 어른들이 알고 있던 기술 시대는 이미 저물어가니까.
E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