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경제/경영 블로그 답게 피터 드러커의 21세기 비전의 마지막인 자기 혁신편 <이노베이터의 조건>을 정리해보겠다. 우선 번역서의 제목(이노베이터의 조건)과 부제목(어떻게 스스로를 혁신할 것인가)에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는데, 원서 제목이
책의 큰 목차를 보면, 사회(격동의 전환기), 경제(단절 이후의 시대), 정치(새로운 모색의 시대), 지식과 교육(다시 시작하는 미래)의 4부분으로 되어 있다. 목차만 봐도 예상이 가능하듯이 정치/경제/사회/문화(여기서는 지식/교육에 집중)라는 커다란 주제 4개를 모두 다루고 있기 때문에 드러커의 어느 책 보다도 지식의 밀집도가 높고 사회 과학(요즘 이런 단어를 잘못쓰면 잡혀간다는 소문이 있다. T_T)적인 특성이 강하다고 보면 틀림없다. 이 책 서문을 읽다가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인데, 드러커는 경영 관련 저술가이기도 하지만 사회와 공동체 관련 저술가이기도 하기 때문에 경영 대가가 사회에 대해 적은 책이라는 선입견은 접어도 좋다. 잠깐 해당 구절을 살펴보자.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경영 관련 저술가로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의 저술들 가운데 절반 가량은 경영에 관한 것들이 아니라 사회와 공동체에 관한 것들이다. 또한 내가 경영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애초에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본문 중에 눈에 들어온 몇 가지 구절을 살펴보자. 좋은 구절이 너무 많아서 일부만 정리해보았다.
우리는 경제인의 개념에 기초한 사회를 구제하기 위한 최후의 절망적인 노력으로서 경제학자를 선택했다. 마치 18세기의 사회가 합리주의 철학자들에게 왕좌를 내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18세기 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20세기 경제학자들 역시 실패했다.
사회 영역에서 인간은 처음에는 '정치적 인간'이 그리고 그 다음에는 경제인이 되었다. 사회 영역에서 자유와 평등은 경제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을 의미하게 되었다.
경제 발전을 추구한 결과 공황이 발생했던 것처럼, 바로 그 전제 때문에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결과를 제거함으로써 사회를 유지하려는 시도는 본질적으로 모순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유럽 전역에 점차 퍼져 나가고 있다.
파시즘 체제는 구질서의 실체를 무자비하게 파괴했지만, 그 외적인 형태는 매우 신중하게 유지하고 있다.
파시즘은 탈경제화를 통해 경제적으로 불평등할 수 밖에 없는 산업 사회의 생산 시스템을 유지하고 또한 타당한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파시즘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쪽 모두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단정하고, 두 가지 모두를 초월하는, 즉 경제적 가치에 기초하지 않는 사회를 추구한다.
제조업의 육체 노동자들과 그들의 노동 조합은 예전의 농민들과 같은 길을 갔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설자리를 '기술자들'에게 내줘야했다.
이전의 농민들과 하인들이 쉽게 육체 노동자가 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육체 노동자들이 지식 노동자가 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전문 지식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성과도 올릴 수 없다. ... 전문가가 성과를 올리고 공헌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직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마르크스의 위대한 통찰력은 공장 노동자들은 생산 수단을 소유하지 않으며 소유할 수도 없기 때문에 '소외'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간파한 데 있다.
지식 사회에 있어 진정한 투자 대상은 기계도 도구도 아니다. 그것은 지식 근로자이다.
전략이란 조직의 목표를 실제적인 성과로 전환하는 수단이다.
지식 근로자들은 공동체로서 조직에 자신을 종속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거부한다.
오늘날에는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곧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들에게는 성과를 낼 수 있는 기회,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기회, 승진의 기회 등이 좀더 큰 곳을 찾아 언제라도 옮겨갈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폐기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가장 중요한 의사 결정인 데도 불구하고 가장 소흘히 다뤄지고 있는 의사 결정이기도 하다.
조직이 따라야할 제 1원칙은 바로 '집중'이다.
목표 달성 능력을 얻기 위한 실용적인 방법이나 기술 같은 것은 없다.
사실 모든 경영가는 사람을 고용하지 않고도 조직을 운영할 수 있으면 하고 바랄 것이다. 조직의 경영자에게 있어 사람들이란 성가신 존재다. 경영자는 사람들을 '통치'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직무 수행을 방해할 뿐이다.
악법은 범행을 예방하지는 못하면서 옳은 행위에 대해서는 처벌을 가한다. 악법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기초해 제정된다.
오늘날 조직은 자신의 권한을 '피지배자들의 동의'에 의해 확보할 수가 없다.
각각의 조직은 자신의 목적을 분명하게 규정하면 할수록 더욱더 강한 조직이 될 수 있다.
혁신의 기회는 거대한 폭풍처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살랑거리는 미풍처럼 소리없이 찾아온다.
계몽 사상과 프랑스 혁명은 정말이지 자유의 뿌리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진정 오늘날 이 세계(1930년대 말 ~ 1940년대 초)를 위협하고 있는 전체주의적 독재의 씨앗이었다.
(유럽의 경우를 볼 때) 자유주의에 입각한 운동이나 정당은 그 신조에 있어 모두 예외없이 전체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서 자유주의 역시 처음부터 전체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미국의 수많은 개혁 운동 역시 대게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미국의 모든 지방 자치 정부의 역사를 봐도, 이성주의자들이 비록 그 의도는 좋을지라도 정치적으로는 매우 무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성주의적 자유주의자는 오직 뭔가를 부정하고 반대할 수 있을 뿐, 스스로 행동하지는 못한다.
"지식인은 좌파에 서야만 한다."
지식인은 글과 지면을 통한 타당한 주장은 잘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무능하다.
마르크스는 이성주의를 포기하고 비이성주의적 절대주의를 공공연하게 채택함으로써 무능한 이성주의적 자유주의를 강력한 정치적 세력으로 전환했다.
미국과 영국의 보수주의자들은 과거를 복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복원하려는 의도도 없었다.
미래를 위한 청사진이나 만병통치약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당면한 문제에 대한 유효한 해결책 -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해법일지라도 - 을 찾는 데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존 F 케네디는 권력의 획득 이외에는 사회에 의한 구제를 위한 어떤 계획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이던 20세기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었다.
우리는 가르치고 배우는 데 있어 단 하나의 올바른 방법이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2차 대전 이후에 모든 국가들은 정부가 지출할 수 있는 규모에 있어 경제적 한계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령의 은퇴자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어떤 사람의 잘못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는 것도 아니다.
파이를 똑같은 크기의 조각으로 자르는 것을 고집하면, 파이의 크기는 오히려 줄어들고 말 것이다.
우리는 지식의 탐구에 있어 물리적 한계점에 이르러 있다. 사용할 수 있는 자원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가장 부족한 자원은 돈이 아니라, 사람이다.
전통적 학교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전과목 A인 학생들'은 모든 면에서 평균적인 수준을 만족시키는 학생들이다. 하지만 그 학생들은 뭔가를 성취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순응을 잘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모든 인간은 어느 날 갑자기, 그야말로 느닷없이 자신이 죽음에 직면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물론 세상은 예측한 방향대로 흘러가지 않기에 피터 드러커가 설명하고 예언한 내용이 모두 맞지는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경제/사회/문화를 경영 관점에서 바라보는 드러커의 시각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기 바란다. 강력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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