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2월 16, 2019

[B급 프로그래머] 다음 자바스크립트 코드에서 오류는?

요즘 어쩌다보니 React.js 공부를 (반강제적으로?) 하게 되어서 자바스크립트를 다시 복습하고 있는데 Can You Find The Bug in This Code?라는 글이 재미있어 독자 여러분들께 소개하고자 한다. 다음 코드에서 이상한 부분을 찾을 수 있겠는가?

직접 입력한 다음에 실행해봐도 되지만, 여러분들의 수고를 들기 위해 개발자 도구의 콘솔에 출력된 결과를 보여드리면 다음과 같다.

Uncaught TypeError: (intermediate value)(...) is not a function

hello와 world!가 각각 찍혀야 하는데 이상한 오류 메시지만 나온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잠시 생각해봤는데 감이 오지를 않아서 본문 내용도 읽어보고 추가 자료도 검색한 결과 자바스크립트는 보면 볼수록 난감한 물건(응?)이라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혹시 문제를 풀지 못한 독자분들을 위해 힌트 1번 나간다.

힌트 1번: 7.9 Automatic Semicolon Insertion

ECMA 표준 규약에서 뭔가 중요한 힌트를 주고 있는데, 자동화된 부분이 반대로 개발자를 힘들게 만드는 사례로 봐도 무방하다.

여전히 문제를 풀지 못한 독자분들을 위해 힌트 2번 나간다.

이렇게 놓고 보니 뭔가 의도하지 않은 부분이 보이는가? 주범은 세미콜론(;)이다. 앞서 언급한 7.9 섹션을 보면 알겠지만 함수 호출과 관련해서는 자동으로 세미콜론을 넣어주지 않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제 어디를 수정하면 될지 알겠는가? 정답을 보자.

오늘의 교훈: 자동화된 기능을 너무 믿지 말고 세미콜론을 붙이자.

EOB

목요일, 2월 14, 2019

[B급 프로그래머] 2월 2주 소식(빅데이터/인공지능, 암호화폐/블록체인, 읽을거리 부문)

(오늘의 짤방: Books Smell Good via @PhilosophyMttrs)
  1. 빅데이터/인공지능
  2. 암호화폐/블록체인
  3. 읽을거리
보너스: 글쓰기의 중요성(한글 자막)
EOB

토요일, 2월 09, 2019

[독서광]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은 다음에 호모 데우스는 건너뛰었는데, 지인의 추천에 의해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을 읽게 되었다. 다음 구글 talk 영상을 살펴보면 책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각 장의 마지막이 다음 장으로 절묘하게 이어지기 때문에 계속해서 생각을 연결하게 유도하는 특징이 있다. 일, 자유, 평등, 공동체, 문명, 민족주의, 종교, 이민, 테러리즘, 전쟁, 겸허, 신, 세속주의, 무지, 정의, 교육, 의미, 명상 등의 굵직 굵직한 주제를 놓고 인간의 기술 발전에 힘입어 현재와 미래의 변화 상황을 조망한다. 기존 사이엔스가 역사책이라면, 이 책은 미래서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이 읽는 독자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이유는 현재 추세에 발맞춰 미래에 부딪힐 상황을 선명한 그림으로 그리기 때문이다. 단순히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가 된다"라고 정의한 다음에 이런저런 상상에 기반한 백일몽을 꿈꾸는 대신 기존의 인류 발전 추세를 보간해서 정확하게 움직임을 투영한다. 고만고만하게 관성에 젖어 살다보면 상당히 암울한 미래에 부딪히겠다는 걱정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지만 중간 중간 해법과 희망을 제시하기도 하니 울었다 웃었다 해야할 판국이다.

본문에 나오는 몇 가지 기억할만한 문구를 정리해보겠다.

인간은 사실과 숫자, 방정식보다는 이야기 안에서 생각한다. 이야기는 단순할수록 좋다.
자유주의 이야기는 세상의 모든 것이 좋은 상태에 있지는 않으며, 여전히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1938년, 사람들에게 주어진 전 지구적 이야기의 선택지는 세 가지였고, 1968년에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 그러다 1998년에는 한 가지 이야기만 득세하는 듯 보였다. 급기야 2018년 우리 앞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똑똑한 알고리즘이 예산이나 새로운 세제 개혁안을 승인하기를 정부가 초라하게 기다리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나? 그러는 사이 피어투피어의 블록체인과 비트코인 같은 암호체계가 기존 통화 체계를 완전히 재편하면서, 결국에는 근본적인 세제 개혁이 불가피해질지도 모른다.
21세기 포풀리즘 반란은 사람들을 착취하는 경제 엘리트가 아니라 더 이상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경제 엘리트에 맞서는 구도로 전개될 것이다. 이는 지는 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착취에 반대하는 것보다 사회와 무관해지는 것에 맞서 투쟁하기가 훨씬 힘들기 때문이다.
만약 거리로 달려 나가 "종말의 날이 왔다!"라고 외치고 싶으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보라. "아니야, 그건 아니야. 사실은 내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이야."
기술 혁명은 조만간 수십억 인간을 고용 시장에서 몰아내고, 막대한 규모의 새로운 무용 계급을 만들어낼지 모른다. 이는 현존하는 이데올로기는 모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사회적, 정치적 격변으로 이어질 것이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이래, 기계 한 종에 사람의 일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새로운 일이 또 생겨났고, 평균적인 생활 수준은 극적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다르다고 생각할 이유는 충분하다. 기계 학습이야 말로 확실히 판도를 바꿔놓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특히 AI는 다른 사람에 대한 직관이 필요한 업무에서는 인간보다 더 뛰어날 수 있다.
AI가 보유한 비인간 능력 중에 특별히 중요한 두 가지는 연결성과 업데이트 가능성이다.
결국 감정이란 것도 어떤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다. 생화학적 과정의 결과물일 뿐이다.
2050년 고용 시장은 인간-AI의 경쟁보다는 상호 협력이 두드러진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생겨난 일자리는 모두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비숙련 노동자의 실직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거라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인간 일자리가 많이 생긴다 해도 새로운 '무용' 계급의 부상은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두 세계의 최악을 함께 겪을 수도 있다. 높은 실업률과 숙련 노동력의 부족이 동시에 닥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19세기 마차 몰이꾼이 아닌 말의 운명을 맞을 수 있다. 마차 몰이꾼은 택시 기사로 전환할 수 있지만, 말은 점점 고용 시장에서 밀려나기 시작해 결국에는 완전히 퇴출됐다.
직업의 변동성이 커지면서 노조를 조직하거나 노동권을 확보하는 일도 더 어려워질 것이다. 이미 오늘날에도 선진국에서 생겨나는 많은 신규 일자리는 보호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이거나 자유계약직, 혹은 일회성 업무직이다. 버섯구름처럼 급속하게 생겨났다가 10년도 안 돼 사라지는 직업을 가지고 어떻게 노조를 결성할까?
앞으로 우리가 끊임없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노동자들을 재훈련할 수 있다 하더라도, 평균적인 인간이 그런 끝없는 격변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감정의 근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아해할 수도 있다. 변화는 늘 스트레스로 가득하다.
책을 출간할 때 출판사는 내게 온라인 홍보에 쓸 짧은 글귀를 써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출판사에는 그 분야의 특별한 전문가가 있어서 내가 써준 것을 구글 알고리즘의 취향에 맞춰 다듬는다.
과거 값싼 비숙련 노동은 세계 경제의 빈부 간극을 가로지르는 안전한 다리 역할을 했다. 비록 국가가 느리게 발전하더라도 결국에는 안전지대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올바른 단계를 밟아가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이제 그 다리는 흔들리고 있다. 조만간 붕괴할지도 모른다. 이미 다리를 건너간 나라는 아마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뒤쳐진 나라는 협곡의 좋지 못한 쪽에서 건너갈 수단도 없다.
호모 사피엔스는 만족을 위해서만 설계되지는 않았다. 인간의 행복은 객관적 조건보다는 우리 자신의 기대에 더 크게 좌우된다. 하지만 기대는 조건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의 조건도 포함된다.
국민 투표와 선거는 언제나 인간의 느낌에 관한 것이지 이성적 판단에 관한 것이 아니다. 만약 민주주의가 이성적인 의사 결정의 문제라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투표권을, 혹은 그 어떤 투표권도 줘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사람 마음에 대한 이런 의존은 자유민주주의의 아킬레스건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베이징이나 샌프란시스코의) 누군가가 인간의 마음을 해킹해서 조작하는 기술력을 얻게 되면, 민주 정치는 감정의 인형극으로 돌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느낌과 자유 선택에 대한 자유주의의 믿음은 자연적인 것도 아니고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다. 불과 지난 수 세기 동안 권위의 원천은 천상의 신에게서 피와 살을 가진 인간으로 이동했다. 조만간 권위는 다시 이동할지 모른다. 이번에는 인간에게서 알고리즘으로 말이다.
우리는 대체로 감정이 사실은 계산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왜냐하면 계산의 과정이 자각의 문턱 훨씬 아래서 순식간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존과 재생산의 확률을 계산하고 있는 뇌속의 수백만 개 뉴런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뱀에 대한 공포나 성관계 상대의 선택 혹은 유럽연합에 관한 의견이 어떤 신비한 '자유 의지'의 결과라고 착각한다.
철학자들은 그런 '트롤리 문제'에 관한 논쟁을 수천 년간 계속해 오고 있다. 하지만 이런 논쟁이 지금껏 실제 행동에 미친 영향은 민망할 정도로 미미했다. 왜냐면 인간은 위기의 순간에 처하면 철학적 견해는 다 잊고 대신 자신의 감정과 직감을 따르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 민주주의가 독재를 능가했던 것은 데이터 처리에서 우월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정보를 처리하고 결정하는 권한을 사람과 기관에 분산하는 반면 독재는 한곳에 집중한다. 20세기 기술로 보면 너무 많은 정보와 힘을 한곳에 모으는 방식이 비효율적이었다. 그 누구도 모든 정보를 충분히 빠르게 처리하면서 옳은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소련이 미국보다 훨씬 나쁜 결정을 내리고 경제도 훨씬 뒤처진 데에는 이런 점도 작용했다. 하지만 AI가 등장하면서 조만간 시계추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AI 덕분에 막대한 양의 정보를 중앙에서 모두 처리할 수 있게 됐다.
공상과학은 지능과 의식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컴퓨터가 인간 지능을 따라잡거나 능가하기 위해서는 의식을 개발해야 한다고 가정한다. 거의 모든 영화와 소설에서 AI에 관한 기본 플롯은 컴퓨터나 로봇이 의식을 얻는 마법 같은 순간을 축으로 삼는다. 하지만 현실에서 인공지능이 의식을 얻을 거라고 가정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지능과 의식은 상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능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인 데 반해 의식은 고통, 기쁜, 사랑, 분노처럼 어떤 것을 느끼는 능력이다.
고대에는 토지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이었다. 근대에 와서는 기계와 공장이 토지보다 더 중요해졌고, 정치 투쟁도 이런 핵심적인 생산 수단을 지배하는 데 집중됐다. 하지만 21세기에는 데이터가 가장 중요한 자산으로 부상하면서 토지와 기계는 밀려났다.
광고 판매는 단기적으로 거인 기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앱과 상품과 기업을 평가할 때도 매출액보다는 그것을 통해 모을 수 있는 데이터를 기준으로 삼는다. 지금 당장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지 모른다 해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하다. 데이터야말로 미래에 생활을 통제하고 형성하는 데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흐름에 저항하기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공짜 이메일 서비스와 재미있는 고양이 동영상에 대한 대가로 자신의 가장 가치 있는 자산 - 개인 정보 - 을 내주면서도 좋아한다.
'경험 공유'라고 부르는 것도 사실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부추긴다. 실제로 자신의 느낌마저 점점 더 온라인 반응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가 옛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귀중한 유산이라고 고집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우리의 조상이 오래전에 죽었으며 이제는 스스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옛 전통을 왜곡하는 일은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전쟁은 또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훨씬 더 큰 관심을 갖게 만들기도 한다. 미국과 러시아가 냉전 때보다 더 긴밀하게 접촉한 시기도 없었다. 그때는 모스크바 복도에서 기침 소리가 날 때마다 워싱턴 사람들이 허겁지겁 계단을 오르내리곤 했다. 사람들은 무역 상대국보다 군사 적대국에 훨씬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베트남을 다룬 미국 영화가 타이완을 다룬 것보다 50배는 많을 것이다.
만약 이란과 북한이 E=MC^2가 아니라 E=MC^4라고 믿는다면 이스라엘과 미국은 그 나라의 핵 프로그램에 추호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우리가 가장 자주 싸우는 상대는 한 식구들이다. 정체성은 일치보다 갈등과 고민으로 규정된다.
미래에 우리에게 닥칠 변화가 무엇이든 그것은 이질적인 문명들 간의 충돌보다는 단일 문명 내 형제들끼리의 투쟁을 수반할 가능성이 높다.
상식과는 반대로 민족주의는 인간 정신의 자연적이고 항구적인 요소가 아니며 인간 생물학에 뿌리를 두고 있지도 않다.
민족주의가 없으면 우리 모두가 자유주의 낙원에서 살 거라고 상상하는 것은 위험한 착각이다. 오히려 부족의 혼돈 속에서 살 가능성이 높다.
과학의 승리는 너무나 완벽해서 종교에 대한 우리의 개념마저 변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종교를 농사나 의료와는 관련짓지 않는다. 심지어 광신자들조차 다수는 과거 농사와 의료가 전통 종교의 관할이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거나 잊고 싶어 한다.
예수가 했단 말 중에는 노골적인 공산주의 색을 띤 것도 얼마간 있지만, 냉전 기간 선량한 미국 자본주의자들은 별로 개의치 않고 산상수훈을 계속 읽었다. '기독교 경제학' '이슬람 경제학' '힌두 경제학' 같은 것은 없다.
인간 개인이 세상에 관해 아는 것은 창피할 정도로 적다. 더욱이 역사가 진행돼가면서 개인이 아는 것은 점점 더 줄어들게 되었다.
대부분의 우리 견해는 개인의 합리성보다 공동체의 집단사고에 의해 형성된다. 우리가 이런 견해를 고수하는 것도 집단을 향한 충성심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사실을 쏟아놓고 그들 개인의 무지를 들춰낼 경우에는 오히려 역풍을 맞기 쉽다. 대다수 사람들은 너무 많은 사실은 싫어한다. 게다가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지는 것은 더더욱 싫어한다.
어떤 주제를 깊이 파고들고 싶다면 그만큼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 특히 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 특권이 필요하다. 비생산적인 경로도 실험해보고, 막다른 길도 탐색해보고, 의심과 심심풀이의 여지도 둬야하고, 작은 통찰의 씨앗이 서서히 자라서 꽃을 피우게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면 결코 진실도 찾을 수 없다.
설상가상, 거대한 권력은 불가피하게 진실을 왜곡한다. 권력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바꾸는 데 관심이 있다.
거대 권력은 블랙홀처럼 주변 공간 자체를 왜곡한다. 그 곁에 가까이 갈수록 모든 것이 더 심하게 뒤틀린다. 어떤 말이 됐든, 당신의 궤도로 진입할 때는 단어 하나하나에 무게가 더해진다. 당신이 만나는 사람은 저마다 당신에게 아첨하거나 당신을 달래거나 아니면 당신에게서 뭔가를 얻어내려 한다. 그들은 당신이 1, 2분밖에 시간을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행여 자신의 말이 부적절하거나 뒤죽박죽이 될까봐 노심초사하다가 결국에는 아무 알맹이 없는 슬로건 내지는 가장 흔한 상투어만 내뱉고 만다.
혁명적인 지식은 권력의 중심에서 출현하는 경우가 드물다. 왜냐하면 중심은 언제나 존재하는 지식을 토대로 구축되기 때문이다. 구질서의 수호자가 권력의 중심에 다가올 수 있는 자를 결정하는데, 이때 전통에서 벗어난 파괴적 사상을 가진 자는 걸러내는 경향이 있다.
사실 호모 사피엔스의 의제에서 진실이 높은 순위를 차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실제로는 '어떤 것이 인간의 협약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어떤 것이 본질적으로 가치 있다고 믿는 것' 사이에 선을 긋기란 불가능하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이런 구분에 관해 모호한 태도롤 취하거나 아예 잊는다.
인간에게는 이처럼 알면서 동시에 모를 수도 있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엇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면 알 수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그것에 관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 가령, 정말로 주의를 집중하면 돈이 허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평소에는 그런 식으로 주의를 집중하지 않는다.
이미 1848년에 <공산당 선언>은 "모든 단단한 것들은 공중으로 분핸된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로 염두에 둔 것은 사회적, 경제적 구조였다. 2048년이면 물리적, 인지적 구조 또한 공중이나 클라우드 속 데이터 비트로 분해될 것이다.
21세기에는 안정을 누릴 만한 여유가 거의 없다. 어떤 안정된 정체성이나 일, 세계관을 고집하려 들다가는, 세계는 휙 지나가고 자신은 뒤로 처지는 위험을 무릅써야만 한다. 게다가 기대수명까지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후로도 수십 년을 멍청한 화석 상태로 보내야 할 수 있다. 앞으로 세상에 뒤쳐지지 않고 살아가려면 -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 끊임없이 배우고 자신을 계속 쇄신하는 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50세 정도의 젊은 나이라면 확실히 그래야만 한다.
그런 세계에서도 살아남고 번성하기 위해서는 강한 정신적 탄력성과 풍부한 감정적 균형감이 필요할 것이다. 반복해서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 중에서도 어떤 것은 버리고, 그전에는 자신이 몰랐던 것도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불행히도, 아이들에게 미지의 것을 포용하고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는 법을 가르친다는 것은, 물리학 방정식이나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책 한 권을 읽거나 강의 한 번 듣는 것으로 회복탄력성을 배울 수는 없다. 대개는 교사 자신들이 21세기가 요구하는 정신적 탄력성을 갖고 있지 못할 때가 많다. 이들도 옛날식 교육 체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이야기는 두 가지 조건만 충족시키면 된다. 첫째, 내가 맡을 어떤 역할을 부여해야만 한다. 둘째, 좋은 이야기는 무한정 확장될 필요는 없지만 지금 나의 지평은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 이야기는 나 자신보다 더 큰 무엇 안에 나를 자리매김함으로써 내게 정체성을 부여하고 내 삶에 의미를 준다.
어떤 미래 유산이나 집단 서사 같은 거대 사실의 서사도 믿지않는 사람이라면, 그나마 기댈 수 있는 가장 안전하면서 가성비 높은 이야기는 아마도 로맨스일 것이다. 그것은 '지금 여기'를 넘어서 무언가를 찾지 않는다.
좋은 이야기는 나에게 역할을 주면서 나의 지평 너머로 뻗어가야 하지만 반드시 진실일 필요는 없다. 이야기는 순수한 허구이면서도 내게 정체성을 부여하고 내 인생에 의미가 있다고 느끼게 해줄 수 있다.
왜 사람들은 이런 허구를 믿을까? 한 가지 이유는, 개인의 정체성은 이야기 위에 구축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이야기를 믿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두 번째로, 우리의 개인 정체성뿐만 아니라 집단의 제도 역시 이야기 위에 서 있다. 그 결과 그 이야기를 의심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기초가 튼튼해서라기보다는 지붕의 무게 덕분에 탈 없이 유지된다.
모든 의식 중에서 가장 잠재력이 큰 것은 희생이다. 세상 모든 것 중에 고통이야말로 가장 실감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이야기를 위해 고통을 체험하고 나면 대부분 그 이야기가 실제라고 확신하게 돼 있다.
여성들이 왜 연인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가져오라고 요구할까? 연인이 그만큼 막대한 금전적 희생을 무릅쓴다면, 스스로 그만한 가치 있는 일을 위한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악의 문제는 악이 실제 삶 속에서는 반드시 추악하지는 않다는 데 있다. 악은 사실 대단히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
'파시즘'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fascis'에서 나왔다. '막대 다발'이라는 뜻이다. 세계사에서 가장 흉포하고 살인적인 이데올로기치고는 별 매력 없는 상징처럼 들린다. 하지만 여기에는 깊고 사악한 의미가 있다. 막대 하나는 대단히 약하다. 누구나 쉽게 부러뜨릴 수 있다. 그렇지만 여러 개를 다발로 묶으면 부러뜨리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는 각 개인은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집단으로 한데 뭉치면 대단히 강력하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파시스트들은 어떤 개인보다도 집단의 이익이 특권을 갖는다고 믿으며, 어떤 하나의 막대도 다발의 결속을 깨려 들어서는 안 된다고 요구한다.

결론: 인용 문구들이 무시무시한가? 인공지능과 생명과학을 비롯한 인류의 발전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위험과 기회를 제공하는지 궁금하신 분들께서는 이 책을 읽어보시면 좋겠다. 추천!

E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