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구입해놓고 차일피일 미루다 이번에 지진을 직접 느끼고 나서 갑자기 후다다닥 읽어버린 '관저의 100시간'에 대해 정리해보았다. 우선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프롤로그에 너무나도 잘 드러난다.
논평과 추측은 배제했다. 나는 오로지 팩트로 말하겠다.
저자가 취재 도중에 상당히 열 받았으리라고 추측이 가능한 부분이 많았지만 잘도 참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마지막 나오는 후주에는 누가 어떤 경위로 언급했는지 빽빽하게 적혀 있었고, 도쿄 전력 쪽에서 소송을 걸 경우를 대비해 반론이 있을 경우 취재원을 공개할 용의가 있다는 문구가 여러 차례 나왔다. 다양한 채널로부터 압력이 들어왔을 것 같다. 한국 같으면 이런 책이 나올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부제에서 잘 표현하듯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수습하기 위한 관가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상세하게 소개한다. 한국이야 "청와대는 재난 컨트롤 타워가 아니다"라는 공식 입장 표명이 있었기 때문에 어떨지 모르겠는데, 일본의 경우에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했을 때 총리 관저에 컨트롤 타워가 만들어졌다. 따라서 여기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파악하는 작업이 무척 중요하다. 그리고 바로 이 책의 목표이기도 하다.
지진에 대한 재난 대응 절차가 체계적으로 잡혀 있는 일본조차도 원전 문제에 대해 속수무책인 상황인데, 책을 읽는 도중에 한국은 과연 어떨지 생각했다가 어느 순간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국민안전처 관계자의 최근 발언을 보면, 한국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필적하는 사고가 터지면 어떻게 될지 안 봐도 블루레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하면서 지표 밑으로 충격파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
최대한 정보를 숨기면서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관료 집단, 정작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며 어떻게든 손실을 피하려는 전력 회사, 이권이 있을 때는 번개처럼 등장하다가 책임질 상황에서는 사라지는 학계 인사들이 앙상블을 이루면서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을 읽고 있으려니 많이 괴로웠다. 그래도 중간에 일본이 과연 선진국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일화가 나와서 깜짝 놀랐다. 계획 정전을 실행할 경우 집에서 요양하는 환자들의 목숨이 위태롭기 때문에 개별로 연락할 시간을 벌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나 이재민들의 대피와 불편함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휘발유 보급까지 걱정하는 모습을 보면서 일본과 한국 사이에 벌어진 격차(not 경제적)가 얼마인지 갸늠조차 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전사태와 매뉴얼이라는 글을 적으면서도 한숨을 쉬었지만, 한국에서는 매일 큰 사고 없기를 바라면서 정화수 떠놓고 기도하는 기복신앙을 넘어서긴 틀렸다(털썩). 트위터에서 읽은 문구 하나를 소개하며 마무리한다(via @hjm4606).
미국: 새로운 매뉴얼을 창조
일본: 매뉴얼대로만 움직임
한국: 매뉴얼이 없음
결론: 한국에서 대형 사고가 터지면 어떻게 되는지 이미 수차례 목격하셨지만, 바닥 아래 지하실이라고 더 큰 대형 사고가 터질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Managing the Unexpected도 읽으면 정말 많은 도움이 되리라 확신한다.
E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