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영원한 이방인에 이어 KAISTIZEN님께서 보내주신 이유를 읽어보았다. 독서 감상문 몇자 적어본다.
구로사와 아끼라 감독이 만든 라쇼몽이라는 영화를 보면 똑같은 사건을 놓고 어떻게 사람마다 이렇게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이유를 읽으면서도 라쇼몽을 읽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얼핏 보면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다양한 등장 인물 사이에 이리저리 얽힌 관계를 하나씩 풀어나가는 지은이의 글솜씨가 대단하다는 감탄이 절로 나왔으니 말이다. 범인과 범인을 뒤쫓는 형사(또는 탐정 또는 누명자)에 초점을 맞춰 단편적인 인물 관계만 나오는 일반적인 추리소설과는 달리 딱히 특별한 주인공을 선두에 세우지 않고 다양한 가족과 인물 사이의 관계를 풀어나가는 방식을 택하고 있기에 이유는 상당히 색다른 추리소설을 가장한 가족소설이라고 보면 되겠다.
이유에서는 불특정 화자가 사건에 얽힌 관련자들을 인터뷰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는데, 이런 서술 기법으로 인해 다큐먼터리와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실제로 소설을 읽다보면 지은이가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재구성하고 있지는 않은지 종종 햇갈리기도 하니 말이다. 정통적인 추리 소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방법을 사용하고 있기에(어떻게 보면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따르고 있지만 지은이가 굳이 이 책을 추리소설로 한정짓겠다는 생각이 없어보이기도 한다.) 그 만큼 위험도 높아졌지만(읽는 사람이 단서를 토대로 범인이 누군지 금방 눈치채면 끝이니까), 라쇼몽처럼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를 풀어 놓기 때문에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두뇌 회전을 늦추면 안된다. 불필요한 내용을 흘려서 스포일러로 전락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줄거리나 인물 등은 소개하지 않겠다. :P
번역 상태는 나쁘지는 않고(일본이 한국이랑 그만큼 문화적으로 가깝다는 이야기다. "가깝고도 먼 나라라..." 참 역설적이지?), 페이퍼백 크기로 만들어서 휴대성도 뛰어나기에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읽으면 딱이다. 670페이지가 넘어가므로 페이지 압박이 있긴 하지만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으므로 jrogue군은 출퇴근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책을 읽다가 저자도 아니고 역자도 아니고 jrogue군에게 조금 아쉬운 감정이 들었다. 일본 문화에 익숙하지 않다보니 지명, 이름, 학교 등이 상당히 중요한 힌트를 주는데(예를 들어, 일본 지방마다 사람 성격이 다르고, 이름에 따라 성격이 묻어나오고....), 이런 정보가 모두 날아가바려서 좀더 재미있게 해석 가능한 장면에서 가슴이 머리를 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T_T 물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지만(소설을 많이 읽다보면 문화에도 익숙해지기 마련이니까.), 여전히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일본 소설 몇 권을 더 읽어볼 계획이다.
처서도 지나고 새벽에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독서의 계절이라고 불리는 본격적인 가을을 맞이하여 jrogue군의 물량 공세를 기대하시라. 책이 누적되면 당분간 목요일 뿐만 아니라 화요일에도 독서평을 올려드리도록 하겠다.
E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