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보면 종종 원서와 한국어판 책이 나란히(엄밀히 말해 바로 옆(?)이라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 일상다반사다) 자리를 잡은 경우가 있다. 원서와 번역서 사이에 출간 시차가 벌어져서 미리 원서를 사놓고 보니 번역서가 나왔는데 마침 출판사에서 보내주더라... 뭐 대충 이런 시나리오가 대부분이다. 이번에 소개할 "슬랙: 변화와 재창조를 이끄는 힘"도 원서로 이미 읽어본지 오래된 책이지만 인사이트 출판사에서 보내줬기에 기억을 되살릴겸 다시 한번 꼼꼼하게 읽어봤다. 초 간단 결론: 한번 더 읽어봐도 역시 재미있는 책이다.
슬랙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은 독자 여러분을 위해 구글 사전 서비스에서 검색 결과를 정리해보았다. 슬랙이 뭐냐 하면...
slack - 〈로프·새끼 등이〉 늘어진, 느슨한(loose), 〈말고삐 등이〉 느즈러진;〈규율 등이〉 해이된, 힘이 없는, 맥이 빠진;〈걸음 등이〉 굼뜬, 되는대로의, 부주의한(careless), 태만한
이미 화들짝 놀란 독자들도 계시겠지만, 정시 출근, 절도와 규율을 강조하는 높으신 분이 보시기에 발톱이 쑥 나오는 불경스러운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이 국내에서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것 같다는 걱정은 예사롭지 않은 제목부터 시작되었다. T_T
이 책은 빨리빨리에 길들여진 기업 문화를 바꾸지 않고서는 생산성을 절대 높이지 못한다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 '여유'를 의미하는 '슬랙'을 중심으로 기업 스트레스의 영향, 변화와 성장, 마지막으로 리스크 관리를 설명한다. 슬랙은 출간한지 제법 되었기 때문에, 톰 디마르코가 쓴 후속 작품인 소프트웨어 프로젝트에서의 리스크 관리와 데드라인 : 소설로 읽는 프로젝트 관리를 비롯해 가장 최신 작품인 프로젝트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을 함께 읽어보면 더욱 이해가 쉽지 않을까 싶다.
'슬랙'을 처음 들어본 사람을 위해 설날과 추석 때 꽉 막힌 고속도로 상황을 들 수 있다. 고속도로를 최대로 _효율_적으로 활용하려면 단위 면적당 차량을 가장 많이 수용하도록 주차장으로 사용하면 된다. 하지만 최대로 _효과_적으로 활용하려면 차량 간격을 최소 100m(고속도로 100km 구간에서 안전 거리) 정도로 유지해야 한다. 여기서 100m는 낭비가 아니라 슬랙이다. 슬랙이 없다면 차량이 고속으로 주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많은 회사는 '효율'과 '효과'를 크게 혼동한다. 항상 빠듯하게 경우에 따라서는 부족하게 사람을 유지하며 '효율'을 높였다고 자화자찬한다. 하지만 일이 집중되며 문맥 전환이 일어나면서 일대 혼란이 벌어진다. '효과'적이지 못한 작업 지연, 재작업, 품질 저하가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푼돈 아껴 목돈을 잃어버리는 현상은 너무나도 자주 목격하기에 크게 놀랄만한 일도 대단한 일도 아니게 되어버린 슬픈 현실이다.
'효율'을 높여 '효과'를 줄이는 선에서 끝나면 천만 다행이다. 일을 열심히 해도 '효과'가 떨어지는 조직에서 자부심을 품고 일하는 직원을 찾기란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효율만 강조하는 회사에서는 '초과 근무'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장기간에 걸친 '초과 근무'는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주범이며, 개인의 영혼을 갉아먹는 독약이다. OECD 국가 중에서 대한민국의 노동 시간이 1위지만 생산성은 결코 노동 시간에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정량적인 평가에 익숙한 관리자 입장에서 출퇴근시간 만큼 좋은 평가 수단은 없다. 게다가 주말 특근까지 곁들이면 실패에 대한 훌륭한 변명거리까지 확보한 셈이 된다. "매일 오전 9시 출근 밤 12시 퇴근에 주말 모두 반납하고 모두 열심히 했습니다. 하지만 애당초 불가능한 일정이었습니다."
'슬랙'이 존재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움과 공포가 지배하는 문화 때문이다. 애플이 하청을 준 폭스콘에서 벌어진 노동자들의 집단 자실 소동은 바로 '슬랙'이 부족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두려움과 공포는 전염성이 강하며 한번이라도 이를 사용해 효과를 얻으면(아니 솔직히 말하면 효과를 얻었다고 생각이 들면), 무자비한 일정 단축과 극단적인 인력 감축을 동원하게 된다. 결국 강도는 점점 더 심해지며 결국에는 파멸에 이른다.
지금 여유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보기 어려운 프로젝트 때문에 거의 떡실신할 지경에 놓인 개발자라면, 잠시 발걸음을 멈추자. 그리고 이 책을 한번 읽어보고 어떻게 처신할지 고민해보자. 지금까지 불합리한 방식으로 일해왔다고해서 앞으로도 계속 그럴 필요가 있을까? 성공한 조직이 규율과 유연함을 어떻게 조화시키는지 살펴보고 현재 몸담고 있는 조직이 이런 변화를 수용할만한 그릇이 되지 못한다면 그릇을 박살내고 나오자(그래도 세상은 절대로 안 망한다). 인생은 삽질하기에는 너무나 짧고 소중하기 때문이다.
E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