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도 아프고 일도 하기 싫어서 어떤 영화를 보러 갈까 잠깐 고민하다 아바타를 제쳤다는(?) '허트 로커'를 보러 갔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대단한 만족! 물론 편집의 문제인지 자금의 문제인지 중간에 조금 내용이 이어지지 않는 느낌이 잠깐 들기는 했지만 뭐 이 정도는 충분히 용서가 가능하리라 본다. 큰 화면에 빵빵한 사운드 시스템으로 봐야 제맛인데, 유감스럽게도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마구 푸대접을 받고 있으므로 볼 사람은 얼른 봐야 할 것같다.
이 영화의 각본을 맡은 마크 보울이 플레이보이에 연재한 내용을 영화로 만든 '엘라의 계곡'도 비행기 안에서 이미 보았기에 나름 의미심장한 영화라고 생각하고 갔는데, 완전히 허를 찔리고 말았다. 이 영화를 놓고 반전 영화니 미국 중심 영화니 하는 논의는 솔직히 무의미하다는 생각이다. 소재는 전쟁이되, 사실상 주제는 전쟁이 아니니까. B급 프로그래머가 생각하기에 이 영화의 최대 미덕은 사실성도 아니고 긴장감도 아니고 액션도 아니고 눈물샘을 자극하는 산파도 아니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강조도 아니다. 그러면 뭐냐고? 바로 '몰입'을 대단히 잘 묘사했다는 점이다.
우리의 진짜 주인공이 등장할 때까지 최첨단 디지털 시대에 걸맞게 로봇을 사용해 수색하고 폭발물을 해체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팀장이 전사한 다음에 새로 등장한 월리엄 하사(제레미 네너)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아날로그 방식으로 폭발물 처리 임무를 수행한다. 게다가 거추장스럽다고 두터운 방호복을 벗어던지고 팀원 조언이 시끄럽다고 통신용 헤드셋 까지 집어던진 다음에 오직 뇌관 해체에만 집중하는 장면은 상황 자체만으로도 긴장감을 부여하기에 충분하다. 가장 위험할 때 가장 평온함을 느끼도록 만드는 담백한 시각적인 연출은 긴장감을 배가하는 효과를 준다.
작전 지역에 출동해서 일단 작업(?)을 시작하면 월리엄 하사는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버린다. 사방에 숨어 있는 저격병, 탱크라도 잡으려고 만들었는지 한 두 개가 아니라 여러 개가 함께 연결된 급조 폭탄, 사람을 초조하게 만드는 구경꾼들, 촉박한 시간에서 순간적으로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목숨을 담보로 하는 폭발물 제거 작업은 절대로 불가능한 듯이 보인다. 대의 명분 때문에 군인 정신으로 작업하는 대신 아무 생각없이 집중과 몰입에 빠져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 깊었다. (이 영화에서는 성조기 휘날리는 배경에서 높으신 분이 애국심을 호소하기 위해 일장 연설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격려차 온 높으신 양반은 폭탄 몇 개 제거했으며, 많은 폭탄을 제거하는 비법이 뭐냐고 묻는다. 이에 윌리엄 하사는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우문현답을 한다. ㅎㅎㅎ)
임무를 완수하고 본국으로 돌아간 월리엄은 슈퍼마켓에서 시리얼을 못 골라서 당황해한다. 전쟁의 아픔 때문에 망가지고 사회에 부적응한 나머지 사고를 치는 대신 월리엄은 평화롭고 고요한 일상에서 벗어나 다시 전장으로 폭발물을 제거하러 돌아간다. 자신에게 능숙하고 몰입에 빠질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E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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