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6월 18, 2011

[독서광] 디지털 휴머니즘



간만에 조금 머리 아픈 책을 하나 소개하려고 한다. 부제가 '디지털 시대의 인간 회복 선언'이라고 붙은 디지털 휴머니즘은 세컨드라이프와 Xbox 키넥트를 공동으로 설계한 제론 레이니어가 집필했으며, 원제는 'You are not a Gadget'이다(당신은 전자제품이 아니다?). 레이니어가 가상 현실 부문의 전문가이며 마이크로소프트 소속이며 작곡가라는 사실을 모르고 이 책을 읽으면, 어디서 듣보잡이 감히 소셜 네트워크, 클라우드 컴퓨팅, 모바일이 지배하는 세상에 딴지를 걸까하는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다. 딴지를 거는 목적이 무조건적인 기술 반대가 아니라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목적이 있다고 서문에서 밝히긴 하지만, 1/3 정도까지는 읽는 사람을 무척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절반을 넘기면서부터 컴퓨터를 위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컴퓨터 기술이 중요하다는 자신의 목적을 확실히 들어내므로, 전반부의 불편함을 만회하고도 남는다.



이 책은 넘사벽인 GEB 만큼의 파괴력은 없지만, 나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많다. 음악을 강조하고(본문에서는 MIDI가 현대 음악에 미친 폐해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수학적인 문제 풀이를 예로 들고, 패턴을 찾고, 문화적인 내용을 컴퓨터 기술과 연결하는 내용을 읽다보면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가 떠오른다. 위키피디아가 종의 다양성을 없앰으로써 지식 전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이유, 유투브와 같은 서비스들이 단편화된 컨텐츠를 퍼트리는 과정에서 문화를 퇴보시키는 이유, 롱테일이 부익부 빈익빈을 강화하는 이유, 파생 상품 등이 판을 치게 된 이유와 이에 대한 방어 방법 등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 주변에 벌어지는 현실과 관련해 날카로운 비판도 서슴치 않기 때문에 조금 삐딱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를 좋아하는 애독자분들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그러면 본문 중 재미있는 내용을 살펴볼까?



정보기술만이 지닌 불안정한 특성은, 어떤 디자인이 우연히 틈새를 채워 일단 시행되고 나면 그 완성도와는 상관없이 이를 바꾸기가 매우 어려워진다는 데 있다. 그 디자인은 그 때부터 영구적인 고착물이 되어, 설령 그보다 더 나은 디자인이 나와도 그를 대체하지 못한다.


정말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 아니라면 익명으로 글을 올리지 마라.


항공 공학자는 검증되지 않고 아직 추정일 뿐인 이론에 기반해 만든 항공기에 승객을 태우는 일이 절대 없다. 하지만 컴퓨터 과학자들은 그와 비슷한 죄악을 늘상 저지른다.


컴퓨터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단계에서 이진법적인 선택을 제시하는 불행한 경향이 있다. 익명으로 남거나 완전히 노출하기는 쉽지만, 꼭 충분한 만큼만 드러내기는 어렵다.


지배적이고 공식적인 디지털 철학의 가장 짜증스런 주장은 어떤 분야에서는 무보수로 일하는 군중이 보수를 받는 케케묵은 구식 전문가들보다 더 낫다는 것이다.


까다로운 언론을 상대하는 대신 부시 행정부는 시끌벅적하게 반대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무효화하는 온라인 군중을 어렴풋이나마 인지하고 그를 이용하려 했다.


롱테일 효과는 창작자들의 매출은 별로 늘려주지 못하지만, 무지막지한 경쟁과 끝없는 가격 인하의 압력을 몰고 온다.


과거에는 투자자가 적어도 그 투자로 무엇을 얻게 될지 이해할 수 있어야만 했다. 새로운 유형의 엘리트 투자가와 실제로 현실에서 벌어지는 상황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층의 추상적 관념이 끼어들어서, 투자가는 자신의 투자가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해 개념조차 파악하기 힘들다.


돈의 희소성은, 우리가 지금 아는 대로, 인위적인 것이다. 하지만 정보에 관한 모든 것도 인위적인 것이다. 일정 수준의 강요된 희소성이 없다면 돈은 무가치하다.


차를 훔치거나 집을 터는 일은 쉽지만 실제로 그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극소수다. 자물쇠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혜택을 받는 사회적 합의를 상기시켜주는 불편한 부적일 뿐이다. 기술은 사람들의 선택을 부추길 수 있지만 선택 그 자체를 대체할 수는 없다.


경제학은 '변경 가능한 규칙들을 변경 불가능한 규칙들에 어떻게 가장 이상적으로 배합하는가'하는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다.


엔지니어들은 때때로, 고의로 불완전한 기술을 그보다 약간 덜 불완전하게 만드는, 본질적으로 터무니없는 업무를 떠맡는다.


온라인의 소셜 네트워크 실험이 더욱 급진적이라고 주장하면 할수록, 그 결과가 실제로 보여주는 양상은 도리어 더 보수적이고 복고적이며 친숙하다.


1980년대 초 미디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음에 대한 어떤 단일하고 정확한 개념도 음악을 만드는 과정의 필수적인 일부가 되지 못했다.


위키피디아는 이미 영구적인 틈새 사이트로 승격됐다. 미디나 구글의 광고 교환 시스템처럼 일종의 고착물로 자리잡은 셈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가 잃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해야 한다. 수학적 증명과 같이 이미 알려진 객관적 진실의 경우에도 위키피디아는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대화 속에 끌어오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잠재성을 저해한다.


아마도 말을 잘한다는 것은 여전히, 부분적으로는, 성적 과시의 한 형태일 터이다. 말을 잘함으로써, 나는 내가 지적이며 정보가 많은 사람일 뿐 아니라 성공적인 파트너이자 유익한 짝이라는 점을 과시하는 것이다.


이들 회사에는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의 MIT 박사 출신 엔지니어들이 포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추구하는 비지니스는, 암 치료제나 저개발 국가들을 위항 안전한 식수원이 아니라 소셜 네트워크으의 성인 회원들끼리 테디 베어와 용 등의 작은 디지털 그림들을 주고받게 해주는 모델이다. 기술적 정교함을 추구하는 길의 종착지에, 인류를 유치원 수준으로 퇴화시키는 놀이터가 놓인 꼴이다.


파편화된 현대 사회에 진절머리가 나는 분이라면 현재 상황 파악과 정리를 위해 머리가 조금 아플 각오를 하시고 주말에 여유롭게 차 한 잔 마시며 이 책을 읽어보시면 좋겠다. 오늘 뽐뿌질은 여기까지. ;)



E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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