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뉴스에서 일본 원전에 대한 여러 가지 다양한(몇몇은 사실상 소설에 가까운 경우도 있어 황당할 지경...)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데, 이미 짐작하신 분은 짐작했겠지만 (누가 뭐라 말하든) 체르노빌에는 못미치지만 TMI(드리마일) 원전 사고는 가뿐하게 압도하는 초대형 사고로 보인다. 한 시라도 빨리 좋은 소식이 들려오기를 바라지만 세상이 어디 우리 맘대로 되지는 않는 듯이 보이므로 답답할 따름이다. 오늘은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TMI에서 얻은 교훈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TMI 사고야 일반에게 워낙 많이 알려져서 굳이 여기서 다시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신문 기사를 보니 이건 한번 정리하지 않고 넘어가면 여럿 바보가 될 듯이 보였다. 진행하다보면 이미 알고 있는 식상한 이야기도 여기저기서 튀어 나올지도 모르기에 미리 양해를 구한다.
아주 간단하게 TMI 사건 개요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유지보수 작업중에 일어난 이상 동작이 응축 밸브를 닫히게 만들었다.
- 원자로 냉각수의 온도가 올라가고 압력이 높아졌다. 가압기의 PORV(Pilot Operated Relief Valve)가 자동으로 열렸다.
- 자동 명령에 반응해 (원래 닫혀야 하는) PORV가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 가압기를 통해 냉각수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운영자가 원자로 냉각수 수위가 너무 높다고 생각해 비상 냉각 시스템을 중단하고 더 많은 냉각수를 배수했다.
- 노심 절반이 녹아내린 다음에야 문제를 발견했다.
요렇게 정리하고 나니까 진짜 별거 아닌 단순 사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당일 원전 제어실은 아비규환이었다. 4시에 문제가 발생하면서부터 운영 요원들이 악전분투를 벌였지만 성과가 없었고 6시 경에는 50명여에 이르는 엔지니어, 감독관, 교대 요원이 제어실을 가득 채우고 계기반에서 실마리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쓰고 있었다. 마스터 알람은 계속 울려대고(시끄럽다고 마스터 알람을 끄면 주요 계기반도 함께 동작을 멈춰버리니 신경을 긁는 클락숀 소리를 계속해서 듣고 있어야 한다), 110개에 달하는 경고등이 동시에 껌뻑거리는 데다 유일한 외부 통로로 몇 회선 안 되는 귀중한 전화로는 ("도대체 이렇게 된 원인이 뭐야?"와 같은 ... 그걸 알면 벌써 해결했지!) 현장에서 파악하지 못한 질문을 던지는 고위 관계자의 참견이 쏟아지고, 워낙 얽히고 섥힌 문제가 많다보니 몇 시간 전 로그 기록이 아직도 출력되는 상황에서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여기서 멜러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멜러는 원래 문제가 된 TMI Unit 2 소속이 아니었지만 5시 무렵 참다 못한 엔지니어 한 명이 귀중한 전화선을 빌려 백업으로 와달라고 부탁했고, 사람들이 기진맥진할 무렵인 6시 경에 도착해서 난장판이 된 원전 제어실로 들어간다. 잠시 브리핑을 들은 멜러는 아주 독특한 방법을 사용한다. 바로 상상력을 사용한 '사고 실험'이다. 멜러가 주목한 내용은 가압기의 수위가 올라감에도 불구하고 수압이 떨어지고 있다는 모순이다. 매뉴얼에도 해당 상황에 대한 설명이 없으므로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난장판 속에서 15분 정도 곰곰히 생각하던 멜러는 두 가지 가설을 세운다. 한 가지는 가압기 탱크의 전자 히터를 망가뜨린 고장난 회로 차단기였다. 멜러는 사람을 보내 차단기 패널을 살펴보게 했다. 그 사이에 멜러는 잽싸게 다른 가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만일 원전 냉각 시스템에 자그마한 구멍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하지만 노심을 둘러싼 격납 빌딩에 들어가서 문을 열고 증기가 분출되는 장면을 볼 수는 없다(그랬다간 죽을테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미 두 시간 동안 2000여개에 달하는 계기반을 점검하느라 파김치가 되었지만 단서는 없었다.
절반쯤 찾다 포기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끈질긴 멜러는 격납 빌딩의 공기 압력이 올라가고 온도도 올라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돔형 빌딩에 증기 균열이 있다는 신호였다. 멜러가 컴퓨터 터미널로 가서 온도 그래프를 본 결과 온도는 PORV에서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다. 이미 관리자들도 PORV를 의심하고 점검을 했지만 너무 많은 정보가 동시에 쏟아졌고 설상가상으로 계기반에서 이미 PORV가 닫혀있다고 잘못된 정보를 주는 바람에 이를 무시하고 넘어간 상황이었다. 다른 대안이 없으니 멜러는 허락을 받아 진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PORV를 닫자마자 급격하게 압력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넋놓고 있던 제어실 사람들에게 아주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일단 PORV가 닫히면서부터는 냉각수 순환이 원활하게 이뤄져 노심 온도를 떨어뜨렸고 다음 날 수소 거품이 발생해 폭발의 위험이 감지되긴 했지만 용케 무사히 잘 넘겼다.
그나마 TMI는 나름 행복한(정말 다행스럽게 직접 피폭되어 죽은 사람은 없지만 완전히 정리하는 데 10년 넘게 10억불이 넘는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결론으로 끝나니 기분이 좋아졌는가? 나중에 조사해보니 내부 노심이 상당히 많이 녹아 격납 용기 아래 쪽에 고여있었다. 만일 조금만 더 대응이 늦었으면 완전히 노심이 다 녹아 엄청난 재앙이 발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TMI에서 배운 교훈은 바로 상상력이다. 다들 계기반을 뚫어지게 보느라 사고 실험을 할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15분을 투자함으로써 멜러는 정확하게 문제가 어디 있는지 머리 속으로 원자로를 훓고 다닐 수 있었다. 또한 매뉴얼이나 절차나 완벽함에 의존하지 않고 만족스런 해법을 찾아나서는 BIEGE(Better is the Enemy of Good Enough, 소프트웨어 크리에이티비티 3장 1절 참고) 역시 중요하다. 멜러는 완벽한 정보를 얻기를 포기하고 최소한의 가용 정보로 적용 가능하고 빠르게 행동 가능한 해법을 만들어냈다. 이런 비상 상황에서는 상부에 보고한 다음 명령을 기다리거나 곧이 곧대로 수습하기 위해 완벽한 정보를 수집하려고 뜸을 들일 여유가 없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완벽에 근접한 해법을 찾으면 바로 적용해야 한다.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식을 들으면 현장에서 상상력과 BIEGE를 발휘하고 있는지 정말 궁금해진다. 관료주의와 매뉴얼/절차에 너무 목을 매달고 있지는 않는지 걱정스럽다. <日대지진> "탐욕과 IAEA의 유착이 재앙불러"에서 안드레프 씨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방사능 누출을 막기 위해서는 "창조적 해법, 심지어 판타지나 즉흥성까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좋다. 옆나라 일본은 그렇다 치고 한국은? 그게 더욱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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