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1월 06, 2013

[영화광] 라이프 오브 파이(강력한 스포일러 있음)

경고: 일단 들어가기 앞서 이 글에는 강력한 스포일러가 들어있다는 주의 사항부터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 영화를 아직 안 보신 분들께서는 지금 바로 탭을 닫으시기 바란다.

와호장룡을 보신 분이라면 다들 동감하시겠지만, 앙 리(李安) 감독의 연출 실력은 정말 뛰어나다고 봐야 한다. 누가 트렌치 코트에 총이 딱 어울리는 저우룬파에게 대나무 막대기를 들고 와이어 액션 연기를 하도록 배짱 두둑하게 밀고 나갈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결과로 만들어진 양쯔충과 장쯔이의 화려하고 큰 동작이 가미된 대결 장면에 이어지는 저우룬파와 장쯔이의 조용한 대나무 숲 대결 장면은 숨막힐 정도로 절제된 영상미를 보여준다(와호장룡 하이라이트 참고). 자 그렇다면 앙 리 감독에게 망망대해에 보트 한 척, 소년 한 명, CG로 만든 호랑이 한 마리를 던져주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앙 리가 아니었다면 얀 마텔이 쓴 베스트셀러인 '라이프 오브 파이' 원작을 들고 가서 영화로 만들겠다고 영화사를 설득하려 했으면 미친 사람 취급 받았을테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분명 우여곡절이 많았을테다...) 20세기 폭스사가 설득에 넘어갔고, 결론적으로 3D에 끌려다니는 영화가 아니라 3D를 끌고 다니는 레퍼런스급 영화가 되어 버렸으니(두말하면 잔소리지만 반드시 IMAX 3D로 보시기 바란다) 앙 리 감독 입장에서는 첫 메이지 영화인 헐크의 흥행 실패 정도는 충분히 극복하고 남지 않을까 싶다.

여기까지는 스포일러를 보지 못하도록 독자 여러분을 배려했다고 보면 되고, 지금부터 본 이야기에 들어가보자. 열린 결말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인셉션'만큼은 아니겠지만 (아마 이 글 읽기 전까지는 그냥 마무리가 조금 불편하다고 느낀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라이프 오브 파이'도 열린 가능성을 품은 결말로 끝을 맺고 있다. 바로 주인공 '파이'의 이야기가 두 가지 버전으로 나뉘어지며, 정말 어떤 버전을 믿는지는(앞 부분에 다양한 종교 이야기가 나온다. 모든 게 '믿음'의 문제라는 듯이 말이다...) 사실상 독자(또는 관객)의 몫으로 남겨진다.

  • 버전 1: 파이 혼자 여러 동물과 함께 보트에 올라탔지만, 결국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파이와 호랑이가 해류를 타고 표류하다 극적으로 구조된다.
  • 버전 2: 여러 사람들이 구명 보트에 올라탔지만, 생존을 위해 잔인하게 서로에게 칼질(T_T)을 한 끝에 파이가 최후로 살아남는다.

영화 속에서 작가가 지적하듯, 버전 1과 버전 2은 (동물과 사람을 1:1로 대응하면) 사실상 동일한 이야기이며 어떤 이야기가 더 맘에 드느냐는 파이의 질문에 작가는 '버전 1'이 'the better story'라 대답한다(불행하게도 한글 자막은 미묘한 뉘앙스 차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그리고 버전 1이 말도 안 된다고 다그치며 파이를 조사했던 일본 관리 두 사람이 쓴 보고서에서 뱅갈 호랑이에 대한 문구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일본 관리들도 '버전 1'로 마음이 기울었다는 사실을 넌저시 암시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정말 버전 1일까? 버전 2일까를 고민하다보면 1:1로 대응할 경우에 버전 1에서 남는 주인공인 '파이'가 문제가 된다. 이런 모순을 해소하려면 버전 1에 등장하는 '파이'와 '호랑이'는 이성과 야성이라는 자아의 분리라고 봐야 한다(영화 초반에 파이의 아버지가 그렇게 '이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버전 1에서 멕시코 해안에 도착해서 호랑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장면은 파이의 본성에 숨어 있던 맹수의 잔인함도 함께 사라짐을 의미한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여기까지 생각이 전개되고 나서 다시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머리 속으로 돌려보니... 중간에 무서운 호랑이가 있어 내가 정신 차리고 살 수 있다는 파이의 독백부터 시작해 중간에 여러 차례 호랑이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마음 약하게 살려주고 나중에는 쇠약해진 호랑이를 무릎에 올려 놓고 슬퍼하는 장면이 갑자기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T_T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버전 1과 버전 2가 오락가락하니 '인셉션'보다 더 많은 고민을 안겨준 영화라고 봐도 무방할 듯이 보인다. 물론 여기에 딱 맞는 정답은 없지만 독자 여러분들은 어떤 버전이 더 나아(better) 보이시는지?

뜬금없는 결론: '라이프 오브 파이'는 결코 방학맞이 어린이용이 아니다.

뱀다리: 실험삼아 가본 수원 CGV IMAX관은 화면도 작고 좌석 앞뒤 간격도 극악이라 추천하지 않는다. E 열에서 봤음에도 불구하고 화면이 작아 보였으니 말이다. 적어도 용산 CGV IMAX관 정도는 되어야 IMAX라는 이름값을 하지 않을까 싶다.

댓글 1개:

  1. 아니 수원오셨으면 연락을 좀 하시지 ㅎㅎ
    Klimt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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