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에도 불구하고 인텔이 거둔 2분기 실적이 무척 눈부셨다. 노트북 판매가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분석 내용이 나오는데, 노트북에 들어가는 CPU가 코어 듀오 시리즈만 있는게 아니므로 인텔이 다른 회사(AMD)에 비해 월등한 경쟁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듯이 보인다.
자, 그렇다면 이렇게 업계를 주도하는 인텔에 숨은 비밀은 무엇일까? 인텔 회장이었던 앤드류 그로브가 쓴 '승자의 법칙'(원제는 'Only the Pananoid Survive',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을 읽어보면 상당히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을 듯이 보인다.
그로브는 '승자의 법칙'에서 전략적 변곡점을 설명하고, 이런 변곡점이 일어나는 시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회사가 발전할지(아니 살아날지)를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차근차근 설명한다. 여기서 전략적 변곡점은 현존 경쟁자들의 힘과 의욕과 역량, 공급처들의 힘과 의욕과 역량, 보완자들의 힘과 의욕과 역량, 당신의 비즈니스가 현재 방법과 다르게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 고객들의 힘과 의욕과 역량, 잠재적 경쟁사들의 힘과 의욕과 역량이라는 여섯 가지 비즈니스에 미치는 영향력 중 한가지에 엄청난 변화(10배 이상)가 일어날 때를 의미한다. 전략적 변곡점이 일어날 때, 기존에 사용했던 경영방식이 붕괴되면서 통제 능력을 상실하기에, 산업계에 새로운 균형 관계가 대두되며 어떤 기업은 흥하고 어떤 기업은 망하게 된다. 전략적 변곡점에 들어간 회사는 단순히 직원을 때려잡아 야근시키고 출장비 아끼고 전기 사용을 제한하고 신형 컴퓨터를 지급하지 않는 등 사소한(?) 노력으로는 절대 상황을 역전할 수 없다.
그로브 회장은 인텔이 이런 전략적 변곡점을 맞이하여 어떻게 사투를 벌였는지 회고하면서 DRAM 사업 포기, 생산 공정에 도입된 X 레이 기술 경쟁, RISC와 CISC 경쟁,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 발전에 따른 위기와 기회이라는 소재를 놓고 차근차근 짚어나간다. 물론 그로브 회장이 이 책을 쓴 다음에도 인텔은 전략적 변곡점이 다가왔을 때, 아이태니엄이라는 사상 초유의 엄청난 삽질, 펜티엄 IV에서 주파수 경쟁에 불을 지피다가 자칫 초가삼간 다 태워먹을 뻔한 엄청난 사고를 저지르긴 하지만 결국 살아나서 다시금 CPU 분야에서 제 일인자 자리를 우리에게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렇다면 인텔 문화가 어떻기에 전략적 변곡점을 무사히 넘겨서 지속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을까? 여느 상명하복식 회사와는 달리 인텔은 철저하게 계급장 때고 회의와 논쟁을 벌이기로 유명한 회사다. 그로브 회장은 딴 회사라면 절대 없애버릴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임원 특혜를 모두 철회해서, 자신도 늦게 오는 날에 주차 공간이 없어 회사를 두어바퀴 돌았다는 일화와 자기 방을 빼서 일반 사원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큐비클로 옮겼다는 일화는 업계 전설로 남아있다.
솔직히 마이크로매니지먼트를 지상 목표로 개발자들을 일일히 간섭하는 X같은 CEO(이런 회사에 다녀봐서 아는데, 내 장담하건데 이런 가부장적인 분위기는 절대 창조적인 제품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낄낄. 만들어내는 제품마다 그 밥에 그 나물이다.)와는 달리 앤드류 그로브 큰 형님은 최전방에서 뛰고 있는 부하 직원들이 포착한 현장에서 일어나는 위기와 기회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으로, 가장 중요한 사실을 가장 늦게 알게 되는 CEO 신드롬을 극복하고 있다. 좋은 예로 RISC와 CISC 논쟁이 인텔 내부에서 격렬한 시점에, 엔지니어 한명이 건방지게도(한국에서는 사장을 가르치려들면 해고감이다. 마이크로매니지먼트 하는데 령이 안 서기 때문이지. 낄낄...) 회장님을 앞에 두고 친절하게 RISC 기술에 대한 가정 교사를 자청해서 상세하게 설명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로브 회장이 인텔은 그래도 CISC로 간다는 결정을 내리는데 이 때 얻은 지식을 활용했음을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로브 회장은 전략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나쁜 일만 예언하는 카산드라같은 직원들도 잊어버리지 말고 챙기라는 주문을 빠뜨리지 않는다(솔직히 B급 프로그래머가 나중에 컨설팅 회사를 차리면 '카산드라 컨설팅'이라고 이름을 붙이려고 했었는데 그러면 바로 망한다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말렸다). "말이 씨가 되었다"는 얼토당토 않은 핑계로 직언하는 부하 모가지를 잘라버리는 CEO가 부지기수인 상황에서 인텔은 당연히 돋보일 수 밖에 없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누군가 인텔의 비밀을 파악해서 똑 같은 전략으로 따라잡지 않는 이상 인텔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업계 선도를 유지하는 회사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아, 이 책과 더불어 B급 프로그래머가 번역한 초난감 기업의 조건에서 8장도 찾아서 읽어보자. 그로브 회장이 인텔 내부 사정을, 우리의 이빨인 채프먼이 인텔 외부 사정을 앙상블로 설명하는 자료를 통해 인텔이 펜티엄 부동 소수점 오류를 대응하면서 저지른 실수와 이를 극복하는 힘겨운 노력에 대해 좀더 제대로 알게 될테니...
뱀다리: '순양함'을 타고 여행을 하는 등(크루즈 유람선이 맞겠지?) 번역 수준은 그다지 좋지 않다. 편집은 더욱 눈물 앞을 가린다. 하지만 원문이 워낙 좋으므로 그냥 참고 읽을 수 있는 수준이라고 보면 틀림없겠다.
E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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