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독서광답지 않게 책 소개가 뜸해지고 있는데, 간만에 경제학 책 한 권 소개할 자리를 만들어야겠다. 오늘의 주인공은 경제학 책인지 포커 책인지 참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월스트리트의 포커페이스'다.
이 책이 참으로 요묘한 이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경제학 이론과 현상을 설명하는 척 하다가 잊어버릴만하면 포커 이야기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포커를 싫어하는 사람은 이 책을 읽을 이유가 전혀 없어보이지만 경제학에 관심 많은 사람이 포커에 관심을 보이지 않기가 오히려 더 어려울 정도니 책 기획 의도는 무척 참신하다는 생각이다.
이 책이 주장하는 내용은 두꺼운 페이지에 비해 아주 단순하다. 독자 여러분을 위해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을 거다. "금융 상품과 도박에는 리스크라는 놈이 존재하는데, 둘 다 자본을 축적하고 집중하는 과정에서 필수이다." 결국 이 책은 500페이지 전반에 걸쳐 금융 상품의 리스크를 설명하기 위해 경제학이 아니라 포커를 대신 설명하는 형국이 되어버린다.
저자인 아론 브라운에 따르면 금융 상품에 리스크가 추가되는 이유는 크게 다음 4가지라고 한다(뒤로 갈수록 중요도가 높아진다).
- 리스크는 투자자들에게 상품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 리스크는 자본형성에 필수적이다.
- 리스크는 승자와 패자를 창출하는데, 역동적인 경제에서는 둘다 필요하다.
- 리스크는 트레이더들을 유인한다.
요즘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비롯한 파생상품이 일반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는데, 이 책에 따르면 요즘 파생 상품에 대한 언론 보도는 너무 부정적인 이미지로 기운 느낌이다. 파생상품이 등장한 이유 중 하나는 리스크를 감소하려는 목적보다는 리스크를 충분히 높힘으로써 기존 주식이나 채권시장에서 보기 어려운 변동성을 부여하여 돈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이다. 즉 자본을 집중하기 위한 수단으로 역동성을 높이는 (도박) 수법일 뿐이라는 사실.
이 책에서는 시장 참여자를 적으로 여겨서 주머니를 털려는 시도는 아예 잊어버려라고 말한다. 보통 주식, 선물 시장을 제로썸 게임으로 보는데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놀랄만한 충고같지만, 1회성 게임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이합집산과 동고동락을 거듭하며 돈이 오가는 게임이므로 개별 선수들을 대상으로 싸우는 대신 아무도 얻으려고 하지 않는 틈새를 발견해서 이익을 달성하고 이를 지키는 편이 돈을 버는 지름길이라고 말한다.
아주 특이한 관점으로 경제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드는 좋은(사람에 따라서는 최악의) 책이므로 포커에 관심이 많거나 경제에 관심이 많거나 (가장 좋게는) 둘 다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이 책을 통해 주식, 선물, 옵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뱀다리: 얼마전에 "땅을 사랑해서" 불법으로 농지를 구입했다는 장관 후보자를 변호하기 위해 내놓은 변명이 "투자"랑 "투기"랑 구분하기 어렵다는 말이 있었다. "투자"랑 "투기"랑은 구분이 안 될지 몰라도 양심불량은 확실히 표가 난다는 사실을 망각한 모양이다. 낄낄...
E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