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침마다 운전을 하는 데 라디오를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얻고자 하는 정보만 (무)의식적으로 쫓아가는 대신 우연에 의해 좋은 이야기나 노래를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종종 월척을 낚기도 한다. 얼마 전에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를 듣고 가사가 너무 좋아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제목이 같은 영화의 OST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DVD를 주문해서 감상했는데, 2001년에 나온 영화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기에 지금까지 이런 좋은 영화를 놓치고 뭐했냐는 후회가 들고 말았다.
연애 이야기에 손발이 오그라들줄 알고 보기 시작했다가 영화의 흐름을 끊기는 커녕 오히려 분위기를 돋우도록 아기자기한 일상을 제대로 묘사하는 데다가 중간 중간 예상치못한 유머 코드까지 곁들여 가며 사랑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풀어내는 감독의 솜씨에 화들짝 놀랐다고나 해야할까? 한쪽은 정보를 생산하는 사운드 엔지니어(상우, 유지태)이며, 다른 한쪽은 이렇게 만들어진 정보를 소비하는 PD 겸 아나운서(은수, 이영애)의 만남과 헤어짐을 보고 있으려니 가슴 한 곳이 뻥 뚫렸다. '건축학 개론'을 보면서 핀셋으로 상처를 뒤집는 듯한 옛 추억에 잠길 수 있었다면, '봄날은 간다'를 보면서는 "꽃은 피고 또 지고 피고"라는 김윤아의 가사에 나오듯 봄이 주는 묘한 죽음/삶/사랑을 다시 한번 관조해 볼 수 있었다.
이 영화의 백미는 다들 공감하겠지만, 후반 벚꽃 신이다. 한국 영화사에 남을 멋진 이별 장면으로 손꼽을만큼 인상적인 이유는 바로 봄의 벚꽃을 배경으로 새로운 생명을 상징하는 '화분'을 선물로 주고 (되돌려) 받으며 약간의 주저함을 뒤로한 채 각자 갈 길을 가는 두 남녀의 모습을 관습적이지 않게 그려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희망이 끝났을까? 아니다. 실연의 아픔을 극복하고 다시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웃는 상우의 마지막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DVD 부록으로 담겨 있는 뮤직 비디오를 찾아서 공유해본다.
봄이 되어 벚꽃을 볼 때마다 이 영화를 다시 감상할 것 같다. 죽음, 삶, 사랑의 의미를 다시 한번 돌아보기 위해서 말이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영화 중 명대사가 가슴 한 곳에 깊숙히 와닿을만큼 사랑에 웃고 울어본 분들께 강력하게 추천한다.
E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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