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1월 15, 2011

[독서광]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간만에 경제/경영책 잠시 접어두고 정치(?) 관련 주제를 읽으려고 책을 한 권 집어들었다. 제목부터 호기심을 마구 자극하는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원서 제목은 "The Rhetoric of Reaction"으로 반동(!)의 수사학 정도로 번역이 가능한데, '보수'와 '지배'를 엮여 2011년 현재 한국 실정에 너무나도 잘 맞는 제목을 뽑았기에 출판사에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다.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어떻게 보면 아주 단순하면서도 명쾌하다. 하지만 반동 아니 보수 세력들이 주로 사용하는 세 가지 수사 기법을 역사적/정치적/경제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으므로 얇고 주장하는 내용이 단순하다고 해서 읽기가 쉽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정치적인 가십거리를 기대했다면 난감한 상황에 빠질지도 모르겠다. 영국 정치, 프랑스 혁명, 마르크스, 하이에크, 케인즈 등의 이야기가 나오므로 정치, 역사, 경제에 관심이 있는 분에게만 이 책을 권한다.



책에서 주장하는 보수의 3대 수사 기법은 다음과 같다.




  •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역효과 명제
  • 그래 봐야 기존의 체제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무용 명제
  • 그렇게 하면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위험 명제


보자마자 뭔가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요즘 복지와 무상급식을 놓고 일부 정치가들이 말한 내용을 한번 보자.



민주당의 소위 보편적 복지정책은 참으로 무책임한 것으로 국민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오히려 국민을 괴롭히고 큰 부담을 안겨주는 정책이다.
(이회창, 역효과 명제 적용)

민주당의 무상복지 정책에 대해 "극도의 평등주의를 지향하는 것"이라며 "좌파적 사회주의적 정책 방향이 민주당의 차기 대권전략이라면 민주당은 사회주의 정권 수립을 옹호하고 있는 것"
(역시 이회창, 위험 명제 적용)

무상의료가 될 경우 의료의 질이 저하돼 서민건강 수준은 오히려 나빠질 수 있다.
(한나라당, 역효과 명제 적용)

복지로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상 저소득층에게 많은 혜택이 돌아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중산층 이상에 혜택이 돌아가는 정책들을 펴고 있거든요?
(오세훈, 무용론 명제 적용)

보수 진영에서 자주 사용하는 수사 기법 그대로를 라떼르도 안 떼고 차용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혀를 끌끌차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에게 이런 논리가 먹혀들어가니 그게 더욱 황당하다. 역시 대한민국에서 논리나 철학 교육을 안 시키는 이유는 다 여기 있었어. T_T



정치 이야기가 많이 나와 조금 읽기가 힘들기도 했지만, 커맨딩 하이츠에 나오는 케인즈와 하이에크 사이의 치열한 이념 전쟁에서 사용한 논리 체계가 무엇인지를 부수적으로 획득하는 성과도 있었다. 케인즈는 역효과가 일어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개입주의적인 거시 경제 정책을 주장했다. 하이에크는 노예의 길에서 "복지국가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그 당시로서는 미덥지 못한 위험론을 제시함으로써 나중에 케인즈 사상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일약 스타가 되어버린 경우다. 밀턴 프리드먼도 반복지국가적 주장을 펼치면서 통화/재정 정책이 불경기를 심화시키거나 실업을 증가시킨다는 무용론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역시 인기(?)를 끌게 된다. 커멘딩 하이츠를 놓고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물고 뜯고 어떻게 논쟁이 벌어졌는지 안 봐도  블루레이 되겠다.



역효과 명제와 무용 명제는 반동(?) 분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강력한 무기지만 양쪽의 근본은 완전히 다르다. 역효과 명제 지지자들은 매우 변덕스런 인간 세계의 특성 때문에 변화 하나하나가 곧바로 생각지도 않았던 여러 가지 반작용으로 이어진다고 보는 반면, 무용 명제 지지자들은 고도로 조직화되어 있고 내재하는 법칙에 따라 진화하는 세계의 특성 때문에 인간의 행위는 세상을 바꾸기에 너무나도 무력하다고 본다. 역효과론은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하는 정치/경제/사회 관련 정책을 심각하게 여기는 반면, 무용 명제는 이 모든 정책을 어리석거나 나쁘다고 비웃는다. 물론 둘 다 변화/진보를 하지 못하도록 초를 친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한 목적이 있다. 본문에 나오는 문구를 한번 볼까?



무용론은 종종 사회 시스템의 기본적인 '구조'를 무시하고, 먼저 그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은 채 이런저런 '부분적' 개선(더 민주적인 통치나 의무 초등교육, 특정 사회복지 프로그램 등)을 이룰 수 있다는 환상을 키우고 퍼뜨린다해서 진보주의자들이나 개혁가들을 꾸짖는다.


(역효과 명제를 주장하는) 반동파는 목적이 진심이건 진심이 아니건 겉으로는 찬성하면서, 그 목적을 위해 제안되거나 취해진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입증하려고 한다. 실제로 반동파는 그런 행동이 의도하지 않은 여러 결과를 낳기 때문에 결국 처음 주창되고 추진됐던 목적과 정확히 반대되는 결과를 낳는다고 흔히 주장한다.


자 그렇다면 이런 논리에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할까? 저자인 앨버트 허시먼에 따르면 역효과, 위혐, 무용론은 신화부터 시작해 역사적으로 엄청나게 많이 사용하고 적용해왔기에 세 가지 방법 자체는 아주 확실(!)하게 사람들 뇌리에 박혀 있어 효과(?)를 발휘하지만 실제 세 가지 틀 속에 숨은 논리 자체는 말이 안 되거나 검증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문제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앨버트 허시먼은 누군가(주로 반동세력) 반복적인 주장을 기계적으로 남용할 경우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고 보고 대칭되는 극단적인 예를 들어 숨은 의도를 분쇄하면 된다고 쐐기를 박는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기에는 보수/반동세력이 사용하는 수사 기법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므로 앞으로도 씨가 먹힐테고 언론에도 많이 오르내리라는 예측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오늘의 교훈: 이런 교묘한 속임수에 당하지 않으려면 못 먹어도 배워야 한다!



E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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